칼럼

[신상일-방송평론가, (전)한국방속작가협회 이사장-]

관리자 │ 2021-07-27

HIT

3560

클린콘텐츠 실천을 위한 드라마산업의 역할과 중요성


신 상 일(방송평론가, 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한국의 텔레비전드라마는 KBS, MBC, SBS 등 주로 지상파 3사 주간 편성단위를 기준으로 볼 때, 매주 대략 30여 편 안팎의 드라마가 방송되어온 지가 꽤 오래되었다. 2, 30년 전 한때 연속극들을 강제로 줄이는 등의 조치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극히 최근 들어 단막극들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마치 그 편수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나 현실에 있어서 드라마 중심의 TV방송 편성은 여전하다. 시청률 10위 안에 들어가는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드라마 이며, 전체 20위까지를 봐서도 극히 일부 프로그램을 빼고는 드라마가 늘 주도하고 있다. 어느 새 한국에 있어서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이미 생활환경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오늘날 양질의 드라마콘텐츠, 클린콘텐츠 실천을 위한 드라마산업의 역할과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이켜 보면 유감스럽게도 그 동안의 우리 텔레비전드라마들 가운데는 아름다운 정서, 감동적인 인간상 등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작품들만 방송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구도, 비정상적인 인물, 순기능보다 역기능에 가까운 표현방식에 더 의존하고, 급기야 저급하고 천박한 상업주의에 함몰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작품도 결코 적지 않았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더니 결국은 인간 말종(末種)들에게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 텔레비전드라마로서의 최소한의 덕목까지 내팽개친 이야기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비판을 듣기에 이르렀다.


텔레비전드라마는 근본적으로 그 대상이 &lsquo\;불특정 다수&rsquo\;이다. 이 말은 곧 특정한 사람, 특별한 계층, 극히 선별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나, 누구나, 전혀 제한이나 차별 없이, 심지어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TV드라마를 접할 수 있고 보게 되는 것이다. 돈을 주고 일부러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간에 보러가야 하는 영화나 연극하고 다르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미리 예정된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영화나 연극, 또는 구매하는 사람만이 접할 수 있는 문학작품과도 다르다.

TV드라마에는 그 내용이나 소재, 표현에 있어서 금도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또한 TV드라마의 매력이며 덕목이고 향기인 셈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우리 TV드라마에 있어 이런 인식이 깨어졌다. 말하자면 텔레비전드라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온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때 정치사회적으로 민주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도 아닌 드라마가 표현의 자유니 소재의 다양성이니 하면서, 예컨대 한 집에 살면서 친구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까지 내보내면서 그것이 곧 소재제약의 철폐와 드라마의 민주화인양 나오기 시작했다. 전혀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불특정 다수의 이용자에게 마치 &lsquo이제 드라마는 못 할 것이 없다. 아무 거나 할 수 있다&rsquo\;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점차 그 미덕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시청연령등급제를 신설하게 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텔레비전드라마 속에 넘쳐나게 된 것이다. 모든 불미스러운 것들이 다 그렇듯이 이런 시대일수록 당연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고, 악화는 점점 더 나쁜 것 또는 더 저질스러운 것을 요구하게 되어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텔레비전드라마는 원칙적으로 시청연령등급이 있을 수 없다. 지금처럼 화면 한쪽 귀퉁이에 19 또는 15, 12세라고 연령 표시를 해놓는다고 해서 안 보거나 볼 수 없는 것이 텔레비전 매체가 아니다. TV드라마는 적어도 언제, 어느 장소에서나, 누구와 봐도 무방한 것이라야 한다. 그것이 텔레비전드라마 스스로의 한계이자 장점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무슨 이야기든 많이만 보게 하면 된다는 논리가 결국 오늘날의 &lsquo\;막가파드라마&rsquo\; 또는 막장드라마를 양산하게 된 기본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시청률은 중요하다. 나쁜 프로그램의 분류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안 보는 프로그램도 분명 나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방송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프로그램을 보게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나 시청률에는 악성(惡性)과 양성(良性)이 있다. 지금의 시청률이 그 내용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수준이며 질적으로 양질인가 아닌가는 간단하게 판단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어차피 한때의 패션처럼 지나가는 악성 시청률의 드라마 추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드라마를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도 실제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곧 한 두 편의 불량드라마만 나와도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진실로 TV드라마가 가진 미덕을 아끼고 방송사의 주력품목의 지위를 유지시키려면 악성보다는 양성의 시청 층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훨씬 오래가고 유리하지 않겠는가.


단순히 불륜이고 복잡한 남녀관계가 뒤엉켜서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또 연하의 미혼남성이 아이까지 있는 여자와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덤비고, 그러다가 끝내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 등식으로 나가는 드라마라고 해서 굳이 막장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도 한두 건 그러는 게 아니라 온통 유행처럼 그러고들 있다. 알고 보니 친구하고 사이에 과거에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속이고 살다가 다시 먼저 남자한테로 간다느니 마느니...이 역시 온통 그런 것처럼 하고 있지만 이렇다고 해서 막장드라마라고 낙인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억지에, 뒤틀기에, 비정상에, 지능미달에, 불륜에, 보편적 윤리의 일탈 내지 모럴의 파괴까지, 한 마디로 정말 가관인 드라마들이 왜 생겨난 것인가. 도무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하고 타당성이 없는 이야기들을 방송사들은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오로지 시청률만 앞세우는 전략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그것도 악성 시청률을 가리지 않고 매달리는 풍토가 되었다.


드라마콘텐츠의 클린 여부는 일차적이거나 최종적이거나 작가에 달렸다. 막장드라마라고 해도 작가의 책임이고 좋은 드라마라고 해도 작가의 몫이다. 그것은 곧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고 드라마의 진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드라마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을 하는 사람이나 비평의 장도 거의 전무한 편이고, 그러자니 자연히 방송사가 홍보차원에서 일방으로 뿌리는 화제중심으로 드라마에 대한 평가가 흘러가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과거 그나마 비판기능을 한 신문 등의 인쇄매체마저 방송의 파워에 밀리면서 올바른 드라마 비평을 싣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감시기능이 약하면 약할수록 저질이 행세하고 판치게 마



이전글 [안종배-한세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다음글 [윤은기-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